
매년 가을 수확기가 되면 풍년의 기쁨도 잠시, 농민들과 정부는 깊은 시름에 빠집니다. 바로 남아도는 쌀 재고 문제입니다. 국민 식생활의 서구화로 쌀 소비량은 꾸준히 감소하는 반면, 생산 기술의 발달로 생산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공급 과잉 구조가 고착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최근 ‘일본으로의 쌀 수출’이라는 카드가 급부상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검토를 지시하면서, 이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넘어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해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것일까요? 장밋빛 전망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한국 쌀의 일본 수출 가능성을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국내 쌀 과잉 생산,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
우리나라의 쌀 공급 과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5년산 쌀 생산량은 소비 예측량을 약 13만 톤 초과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이는 단순히 창고에 쌓아두는 문제를 넘어, 막대한 보관 비용과 관리 인력을 요구하며 국가 재정에 부담을 줍니다. 또한, 시장에 풀리는 쌀의 양이 많아지면 쌀값 하락으로 이어져 농가 소득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게 됩니다. 정부는 매년 시장 격리 조치(공공비축)를 통해 쌀값 안정을 꾀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국내 소비 진작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힌 현 상황에서, 해외 시장 개척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기회의 땅, 일본? – 시장 상황 분석

수출 대상국으로 일본이 거론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우리와 유사한 자포니카 품종의 쌀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이기 때문입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쌀이 남아도는 것과 정반대로 일본은 쌀 부족과 가격 급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정부는 수십 년간 농지 면적을 줄이고 타 작물 재배를 유도하는 ‘생산 조정 정책’을 펼쳐왔습니다. 여기에 최근 몇 년간 계속된 이상 기후와 폭염은 쌀 생산량에 치명타를 입혔습니다. 그 결과, 일본 내 쌀 도매가격은 전년 대비 40% 이상 폭등하며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 쌀에게는 전례 없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비싸진 자국 쌀 대신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 쌀에 대한 수요가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넘을 수 없는 벽인가? 341엔 관세의 실체

하지만 일본 시장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가장 거대한 장벽은 바로 ‘관세’입니다. 일본 정부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 쌀에 대해 1kg당 341엔(한화 약 3,400원)이라는 엄청난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가격 경쟁을 통한 시장 진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아래 표는 관세가 한국 쌀의 가격에 미치는 영향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 항목 | 가격 (1kg 기준) | 비고 |
|---|---|---|
| 한국 쌀 국내 산지 가격 | 약 2,500원 | 수출 원가 |
| 일본 수입 관세 | 약 3,400원 | 1kg당 341엔 적용 |
| 한국 쌀의 일본 내 예상 소비자가 | 약 5,900원 + α | (유통 마진 제외) |
| 일본산 쌀 평균 소매가 | 약 5,000원 ~ 6,500원 | 품질 및 지역에 따라 상이 |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관세를 납부하고 나면 한국 쌀의 가격은 일본산 쌀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비싸져 가격적인 이점을 완전히 상실하게 됩니다. 아무리 일본 쌀값이 올랐다고 해도, 이 관세 장벽을 넘지 않고서는 대규모의 지속적인 수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냉정한 현실입니다.
장벽 속에서 찾은 희망의 불씨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최근 몇 가지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 내 쌀값 폭등이 장기화되면서, 실제로 35년 만에 처음으로 소량의 한국 쌀이 관세를 물고 일본으로 정식 수출되는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이는 고품질 쌀을 선호하는 특정 소비자층에게는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한국 쌀이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또한, 한국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김포공항에 팝업 스토어를 열어 일본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우리 쌀의 우수성을 알리고, 시식 행사를 통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는 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케팅 활동은 당장의 수출 실적보다는, ‘맛있고 안전한 한국 쌀’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여 미래 시장을 선점하려는 장기적인 포석으로 해석됩니다.
지속 가능한 수출을 위한 중장기 전략
단순히 남는 쌀을 처분하는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일본 시장을 성공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하고 다층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첫째,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해야 합니다. 가격 경쟁이 아닌 품질 경쟁으로 승부해야 합니다. 특정 품종(신동진, 삼광 등)을 브랜드화하고, 친환경 및 유기농 인증을 통해 안전성을 강조하며, 소포장 고급 패키징으로 일본의 고소득층과 1인 가구를 타겟팅하는 전략이 유효합니다. ‘매일 먹는 밥’이 아닌 ‘특별한 날 즐기는 고급 쌀’로 포지셔닝하는 것입니다.
둘째, 정부 차원의 외교적 노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관세 문제는 민간 기업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나 특정 품목에 대한 저율관세할당(TRQ) 물량 확보 등, 정부가 외교 채널을 통해 관세 장벽을 낮추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합니다. 이는 농업 분야를 넘어 양국 간의 경제 협력이라는 더 큰 틀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가공식품 수출을 확대해야 합니다. 쌀 원물 수출이 어렵다면, 쌀을 원료로 한 가공식품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떡, 막걸리, 쌀과자, 즉석밥 등은 상대적으로 낮은 관세가 적용될 수 있으며, K-푸드 열풍과 맞물려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유망한 분야입니다.
결론: 단순한 쌀 수출을 넘어, 농업 외교의 시작
한국의 남는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것은 수많은 난관이 존재하는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국내 농업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히 재고를 처리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 농산물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고, 더 나아가 농업을 통한 국가 간 교류와 협력의 지평을 여는 ‘농업 외교’의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단기적인 성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과 치밀한 전략을 바탕으로 꾸준히 문을 두드리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